-
유럽의 만성적 분열과 중국의 만성적 통일총균쇠 2020. 8. 24. 00:53
총 균 쇠:무기 병균 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COUPANG
www.coupang.com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유럽의 만성적 분열과 중국의 만성적 통일
이제 중국에서 있었던 이 같은 일들을, 정치적으로 분열된 유럽의 탐험 선단이 항해를 시작했을 때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앙주 공의 신하가 되었고, 다시 포르투갈 왕의 신하가 되었다. 그러다가 포르투갈 왕에게 서진(西進) 탐험을 위한 배를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콜럼버스는 메디나 세도니아 공에게 호소했지만 그 역시 거절했다. 메디나 첼리 공에게도 호소해 보았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자 그들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다시 요청했을 때는 결국 허락해 주었다. 그 당시 유럽이 통일되어 앞의 세 왕후 중의 한 명이 다스리고 있었다면 남북아메리카의 식민지화는 무산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콜럼버스가 다섯 번째 시도에서 수백 명이 넘는 유럽의 군주 가운데 한 명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것은 바로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하자 다른 유럽 국가들도 스페인으로 흘러다는 부를 목격할 수 있었고, 그중 6개국이 아메리카의 식민지화에 더 가담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전개는 유럽의 대포, 전기 조명, 인쇄술, 소화기(消火器) 등등 무수한 혁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두가 처음에는 유럽 일부 지역에서 무시당하거나 희한한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지만, 일단 한 지역에서 채택만 되면 결국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유럽의 분열에서 비롯된 이 같은 결과는 중국의 통일이 빚어낸 결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 조정은 해외 항해 이외의 활동에 대해서도 이따금씩 중단을 결정했다. 14세기에는 정교한 수력 방적기의 개발을 포기함으로써 산업 혁명의 문턱에서 물러났고, 세계의 시계 제작 기술을 선도하고 있던 기계식 시계를 파기 또는 사실상 전폐해 버렸으며, 15세기 말 이후에는 기계 장치나 기술 전반에 걸쳐 후퇴하게 되었다. 통일의 이 같은 잠재적 해로움은 현대 중국에서도 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휩쓴 문화 대혁명의 광기 속에서 한 명 또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 때문에 전국의 모든 학교가 5년 동안 문을 닫았던 것이다.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고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는데, 두 경우 모두 역사가 깊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들은 B.C.221년에 처음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그때부터 대체로 그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문자가 처음 생길 때부터 문자 체계라고는 하나뿐이었으며, 장장 2000년 동안이나 문화적 통일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럽은 먼발치에서조차 정치적 통일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유럽은 14세기까지도 1000개에 달하는 독립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500년에는 500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최소 25개국까지 줄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늘어나서 내가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40개국에 가깝다. 유럽에는 아직도 45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그 모두가 나름대로 변경시킨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으면 문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하다. 유럽경제공동체를 통해 조금이나마 통일을 꾀하려던 시도조차 좌절되고 말 정도로 유럽은 오늘날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 뿌리박혀 있는 분열 지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이 정치적 기술적 우위를 유럽에 빼앗긴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지도에서 짐직할 수 있다. 유럽의 해안선은 섬에 버금갈 만큼 고립돼 있는 큰 반도가 다섯 개나 있어 매우 들쭉날쭉하며 각각의 반도에는 모두 독립적인 언어와 민족 집단과 정부(그리스, 이탈리아, 이베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가 들어섰다. 반면에 중국의 해안선은 훨씬 완만하며 별개의 중요성을 갖게 된 곳은 인근 한반도밖에 없다. 유럽에는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고 자기들의 언어와 민족성을 유지할 만큼 큰 두 섬(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이 있고, 그중 한 섬(그레이트브리튼)은 유럽의 중요한 독립 강국의 하나가 될 만큼 크고 또한 유럽 본토와도 가깝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가장 큰 두 섬인 타이완과 하이난조차도 각각 아일랜드 면적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며, 최근 타이완이 부상하기 전까지는 둘 다 중요한 독립 강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일본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탓에 최근까지 아시아 본토로부터 정치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는데, 그레이트브리튼과 유럽의 본토의 경우보다 훨씬 그 정도가 심했다.
유럽은 여러 개의 높은 산맥(알프스, 피레네, 카르파티아, 노르웨이 국경의 산맥) 때문에 언어, 민족, 정치 등의 측면에서 각각 독립적인 단위들로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는 반면 중국에서 티벳 고원 동쪽에 있는 산맥들은 그리 대단한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중국의 중심부는 충적토로 이루어진 비옥한 유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두 개의 큰 강(양쯔 강과 황허 강)이 있어서 동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두 강 사이를 남북으로 잇는 통로들도 비교적 평탄한 편이다(결국 두 강이 운하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매우 일찍부터 생산성 높은 두 개의 거대한 핵심 지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두 지역이라고 해도 분리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나의 핵심 지역으로 합쳐졌다. 그에 비하면 유럽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강인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은 규모가 작아서 훨씬 좁은 지역밖에 연결해 주지 못한다. 중국과 달리 유럽은 작은 핵심 지역들이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들을 오랫동안 지배할 만큼 큰 지역은 하나도 없고 각 지역이 만성적 독립 국가의 중심지다.
B.C.221년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자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다른 독립국가가 창건되어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물론 B.C.221년 이후에도 몇 차례의 분열 시대가 있었지만 언제나 재통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샤를마뉴 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통일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절정기의 로마 제국도 유럽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지 못했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 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기술,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자면 기장 재배, 청동 기술, 문자 등은 북중국에서 시작되었고 벼농사와 주철 기술 등은 남중국에서 발생했다. 이 책에서 나는 대체로 강력한 장애물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기술 확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 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603-608
COUPANG
쿠팡은 로켓배송
www.coupang.com
“파트너스 활동을 통해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을 수 있음"
'총균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주민들이 세계를 지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0) 2020.08.26 역사는 거인의 손에 좌우되지 않았다. (0) 2020.08.26 중국은 어쩌다 기술의 선도자 위치를 유럽에 추월당했을까? (0) 2020.08.24 비옥한 초승달 지대가 유럽에 추월당한 불운의 과정 (0) 2020.08.24 인간사회의 궤적에 영향 미치는 환경적 요소들 (0) 2020.08.23